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시절부터 사겼던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했다. 집사람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학번, 같은 동아리, 같은 운동조직에서 있었던 그야말로 나를 너무나 잘아는 친구이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십년지기 친구와 결혼한 것도 나에게 있어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크게 싸우는 적이 별로 없다. 가능하면 서로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알고있다. 간혹 사소하게 다투지만 서로 양보하기 때문에 내가 삐치지 않는 이상 쉽게 화해한다. 그리고 우리 둘사이에는 벌써 10살의 남자녀석과 8살의 딸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이 녀섴들을 보면 우리 속도 모르고 마냥 치기어린 장난에 투정에, 다리도 부러지고, 간혹 끙끙 앓고 그럴때면 정말 대신 아프고 싶은 안타까움이 생긴다. 부모의 마음 다같다고 그렇지만 얘들은 키우면서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 눈물이 글썽거리곤 한다. 혹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이때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결심하지만 잘 안된다. 이게 인지상정인가보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부모님에게 치기어린 투정과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물어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보화촉진기본계획에 대한 분석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복학했다. 그리고 사회진출과 관련된 많은 고민을 했다. 사회운동단체, 언론인, 일반회사 취직 등 그러던 중 고등학교 친구들의 도움으로 스타디모임에 들어갔고 못했던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하게 되고 친구의 제안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다. 당시 고등학교 친구들 중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거나 이미 진학한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들의 입시공부를 따라하면서 결국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고 새로운 공부를 하게된다.


처음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할 때는 언론계 계통으로 진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선택했다. 과거의 경험이 오늘을 지배한다고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면서 ‘비판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하버마스는 ‘후기자본주의 분석’과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세계는 물론 국내에서 상당한 학문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나 역시 하버마스의 이론에 상당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결국 대학원 석사논문은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을 배경으로 정보사회를 분석하면서, 정부의 정보화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문을 쓰게 된다. 그것이 ‘정보화촉진기본계획에 대한 담론분석’이란 석사논문이다. 지금 다시 읽으면 매우 부끄럽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석사논문을 집필했던 경험은 이후 정치권에 들어가서도 전략기획분야의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시대정신 그리고 청년


대학 3학년 이제 학생회의 지도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게된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 유명한 싸움꾼으로 알려지고 학교에서 싸움이 생기면 항상 선두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전체 대열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3학년 봄 ‘반민자당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생애 처음 구속된다.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매 순간 순간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국가기관의 법적 제도적 절차에 순응하며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당시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잘못된 국가권력에 앞에 처참히 깨어지는 자존심과 신념은 나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켰고, 더욱 더 잘못된 권력과의 투쟁을 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용기라면 지금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3개월정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나온 후 곧 바로 반민자당특별위원회 위원장, 총학생회 정치사업국장 등을 맡으며 바로 수배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2년간의 수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지나간 일이만 피끓는 청춘에 학교 밖을 나가지 못하고 2년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간혹 집회때나 몰래 학교밖을 나가기도 했지만 그 때의 숨막히는 상황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때는 주변의 강도사건의 용의자로 오인되어 끌려가다 풀려나고, 체포조에 의해 미행에 걸려 육박전도 해보고, 버스에서 체포조의 미행을 눈치채고 뛰어내리기도 하고 마치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을 경험했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뜨거운 피가 흐른다.


그리고 김염삼정부가 들어서는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수배중임에도 군대에 갔다. 그리고 6개월 후 군대에서 그 사실이 밝혀졌고 사단헌병대에서 기무사의 수사를 받았다. 군 역창에서 재판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 군검찰의 기소유예로 정상적인 군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당시 김영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수배해제 및 대사면이 진행되었고, 다행히 나는 기소유예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나와 관련된 전과는 모두가 사면복권 되었다. 언제가 아버지가 김영삼대통령을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혜택을 받아서 그런지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좋은 인상이 있다. 과거의 지나온 얘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상황을 내가 어떻게 혜쳐나갔는지 지금도 의문이고, 어디서 그러한 의지가 나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다. 아마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고,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드는데 아빠가 참가했었다는 뿌듯함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국민은 항상 현명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시청앞 분수대에 신발이 나뒹굴고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되서 4.19혁명 기념일이 찾아왔다. 선배로부터 말로만 듣던 데모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그날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배들이 데모에 가면 신발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그랬는데 실제로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를 보았다. 말로만 듣던 백골단의 활약도 보았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차차 나도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말하던 운동권 학생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서울가면 제일 조심해야 할 것으로 호남사람들과 빨갱이를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대학에 가고보니 그들은 머리에 뿔난 빨갱이도 아니었고 후배들을 가장 성실하게 챙겨주고 도와주며 인생을 함께 고민하는 좋은 선배들이었다. 가끔 교정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며 싸우고 있던 선배들을 보면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이었고 왜 그들이 저렇게 치열하게 싸우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학교 채플에서 광주학살 비디오를 보게된다. 당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조작된 것이다. 빨갱이들이 조작한 비디오라고 믿고 싶었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장면들이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났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가리려고 하는 모습에 나는 서서히 분노늘 삼키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킬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가 승리하리라 확신했다. 승리하지 못하다면 그동안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국민을 학살한 저들에게 대한민국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후로 수업보다는 거리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운동권학생으로 그리고 그 맨 선두에 항상 서있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동회람은 고등학교 시절 문학동아리 이름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내가 동회람 활동을 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낮은 수준이지만 인생과 철학적인 생각을 함께 할 친구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당시로써는 매우 낯설은 사건이 생긴다. 아마도 전교조운동이 시작되기전 그 전신에 가까운 조직에 우리 동회람 선생님이 참여했고 더 이상 우리를 지도할 수 없었던 사건이다. 시인이시고 우리와 연배 차이가 많이 나지만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우리와 인생을 논해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잘모르는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다니 당시는 금새 잊었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동회람은 나에게 많은 새로운 세상 소식을 전달해주었다. 매해 겨울이면 시화전을 하게되고 대학간 선배들이 홈커밍데이 비슷하게 재학생을 찾는다. 그런데 선배들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전해 주었고, 그들이 대학에서 읽고 있던 흔히 운동권 서적이라 칭하는 책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당시 몇권의 책은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읽어 본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들이 대학에가서 학생운동에 뛰어들게되는 최초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선배들과 몰래 중앙시장 한쪽켠에서 막걸리 몇사발에 군사정권을 비판하던 진지한 토론들에 대한 생각은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일으키곤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고 자란 강릉

 나는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강릉인 줄 알았고, 어린시절 강릉을 벗어나 본 기억이 없다.


『한여름 남대천 제방둑 비석에 칠성뱀장어를 올려놓고 깔깔대며 웃던 불알친구들..., 동명극장에서 중국무술영화를 보고 나와 남대천 제방둑에서 이소령을 흉내내며 쌈박질 하던...,가을이면 어김없이 회산으로 소풍을갔고..., 매일 밤 늦게까지 축구하다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맞던 생각..., 단오장에서 야바위꾼 아저씨에게 걸려 몇푼 안되던 용돈을 털리던 장면, 처음 산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 첫 등굣길을 달리던 모습, 단오제 농상전에서 강릉의 모든 시민이 모여 응원하고 피투성이 되도록 싸우던 농상고 형들의 모습, 오죽현에서 스케치북과 물감을 들고 강릉의 가을을 그리던 기억, 삼형제가 아카시아 나무를 들고 전쟁놀이에서 골목대장하던..., 여름이면 가족들과 경포바닷가에서 한나절 물놀이에 닭튀김과 복숭아를 먹던..., 박정희대통령 서거일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울던 모습...,겨울이면 경포호수 위에서 스케이트와 연을 날리면서 먹던 따뜻한 오뎅 궁물, 보름에는 망우리를 돌리며 다양한 오곡밥을 나누어 먹고..., 잠시 강릉을 벗어나려면 아흔 아홉구비의 대관령때문에 차멀미로 고생하고..., 유남규의 금메달로 탁구장에 몰려가고』


강릉은 나의 부모, 형제, 친구이며 삶이다. 내인생의 꿈과 미래의 기준을 설정해주고, 나를 지금까지 존재하게끔하는 인식의 기반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강릉사랑 홍준일

댓글을 달아 주세요